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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극장에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92년도에 데뷔하여96년에 은퇴인터뷰를 하고 있는 대중가수의 음성이다. 특정 시대의 모습을 ‘극장’과 ‘관객’의 형태로 치환하고 그 사이의 긴장관계를 여러 형태로 질문해오던 과정에서 이번 극장에서는 시대의 기억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의 은퇴독백을 비추고 있는 관객석의 불빛은 건설현장에서 볼 수 있는 용접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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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다중을 위한 기억 극장


 뮌(김민선+최문선)은 이번전시에서 어두운 방에 버티컬을 막처럼 펼쳐 놓고 영상과 소리가 나오는 일종의 극장을 연출한다. 관객을 반구형으로 감싸 안는 원형 경기장 같은 무대에 반딧불처럼 떠도는 빛의 무리는 노동자들의 용접 불꽃이며, 여기에 1996년에 있었던 서태지의 고별인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작가의 기억과 관련된 작품 [1996년-등장인물들의 관계]에서, 용접불꽃은 1980년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상징이며, 서태지는 1990년대의 상징이지만 둘 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또는 사라지려 하는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있다. 노동자든 서태지든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뮌의 기억극장에서 만난 노동자와 서태지는 구별되는 두 시대의 상징이자, 개인의 기억에 강한 흔적을 남긴 문화적 아이콘으로 호출되었다. 또한 이 미디어 극장은 문화의 장이 밝은 광장의 군중에서, 어두운 방의 개인으로 이동한 80년대와 90년대 사이의 변증법을 구현한다. 이 어두운 방은 모두가 겪은 보편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기억극장을 상징한다.

 이 기억극장은 중세의 개인박물관에서 왔다. 그것은 개인의 수집품을 늘어놓는 중세의 박물관 형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수집품이 매번 다르게 조합되어 전시되는 이곳은 한명을 위한 극장인 셈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르는 대개의 수집품들은 두서가 없고 체계적이지 못하다. 기억은 사실과 달리, 빈 구멍이 많은 것이고, 창조적으로 재편집될 수 있기에 역사가보다는 예술가들의 관심을 끈다. 이 전시는 인트로에 해당되며, 앞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대상으로 매번 다르게 상영되는 기억 극장들을 예고한다. 동갑내기 부부 작가인 뮌은 서태지와 비슷한 또래이며, 문화의 시대가 개막된 90년대 초에 20대를 맞는다. 인생에 있어 모든 시간대가 의미가 있지만, 20대는 어떤 때보다도 각별하다. 그들이 작품에 기억을 담고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1990년대였다. 군사 독재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이 거세었던 1980년대라는 격동기가 지난 후, 개막된 1990년대의 20대 젊은이에게 서태지는 무엇이었을까.

 청년기의 주된 억압의 근원지인 학교를 박차고 나와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또 다른 변신을 위해 스스로 대중적 무대를 떠난 서태지는 화려한 문화의 시대에 더욱 생기 없어진 대학생에게, 단지 대중에 영합하는 연예인을 떠나 바람직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비추어지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사실 서태지는 노동자와는 무관한 인물이었지만, 저항의 중심이 집단의 해방에서 개인의 자유로 이동하면서, 저항과 그를 연결시키려는 빈번한 문화 비평이 당시에는 설득력을 얻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해는 곧 IMF가 닥쳐오면서, 정치적 차원에서의 민주화 운동이 87년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으며 시작된 문화의 시대 또한 막을 내리려는 시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는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경제 만능의 시대이다. 냉정한 계산보다는 의지와 열정이 지배했던 정치와 문화의 시대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노동자와 서태지의 위상은 중첩되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뮌의 작품이 기억하는 그 때는, 80년대는 정치의 위세에 밀려, 90년대는 대중문화의 위세에 밀려 예술이 미술대학을 중심으로 초라한 알리바이만을 구축하고 있을 때이다. 문화 및 문화 비평이 득세했던 그 시절에 예술에 대한 자기학대는 유별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봇물 터지듯이 나왔던 1990년대의 다양한 문화적 목소리가 사그라들고, ‘한류’ 따위의 문화상품이 범국가적 차원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성공 모델로 강요되는 이 시점에서, 그들의 작품에 호출된 노동자나 서태지같은 인물은 고전적 반열에 올라 있는 듯이 보인다. 버티컬 위에 반딧불처럼 떠도는 것들은 개체들의 모임인 군집의 이미지가 있다. 하나하나 다른 강도와 형태로 타오르는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전체나 총체성이라는 범주로 묶이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무대의 주인공이 민중도 대중도 아닌 다중(多衆)임을 예시한다.

 다중은 ‘집단 속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유지하는 복수적 존재’(네그리)로서, 지구 안팎을 감싸는 제국의 질서에 저항하는 새로운 주체이다. 저항은 지식인이 이끄는 민중이나 스타가 이끄는 대중이 아니라, 자율적인 개체가 민주적으로 연대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전자매체 사회의 도래는 다중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킨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한국에서 발표된 뮌의 미디어 작품은 미술계의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올해 불혹의 나이가 되는 자신들의 작업이 재미보다는 의미가 있기를 바랬고, 그 시작이 작품에 기억을 담는 것이었다. 미디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그들은 시공간을 편집하는 메커니즘과 기억의 유사성을 감지했다. 그들이 이 전시에서 다루었고 앞으로도 다루려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몇몇 대목들은 보편성을 담고 있는 개별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특수하다. 뮌은 역사 중에서 반복되는 역사를 다룬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 즉 회귀는 필연성이 있다. 누군가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하였고, 또 누군가는 역사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미디어에 기반 한 그들의 작품이 재현주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은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다. 반복이라기보다는 회귀라고 불러야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차이의 고유한 역량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긍정한다. 영원회귀는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를 긍정하고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 등을 긍정한다. 뮌의 작품에서 기억은 재현이 아니라, 차이의 생성이다. 차이가 생성되는 장의 연출은 절묘하다. 그들이 호출하는 기억은 부채꼴처럼 펼쳐진 시간의 주름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장치는 노동자나 서태지 같은 문화 아이콘이 가지는 상징주의를 초과하며, 존재론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접혀지거나 펼쳐지는 시간의 주름 앞에 각각의 모양새와 밝기를 유지하며 떠있는 용접 불꽃은 단자(monad)처럼 각각의 세계를 가지면서도 연대하여 다수를 이룬다.

 들뢰즈는 [주름]에서 라이프니츠가 정립한 모나드의 개념을 암실과 비유한다. 그것은 재현이 가능하기 위한 창이 없다. 그것은 움직이고 살아있는 주름들에 의해 다양화되고 당겨진 천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암실이다. 들뢰즈는 오래 전부터 보아야 할 것이 안쪽에 있는 장소들의 예를 든다. 독방, 제의실, 지하 납골당, 교회, 극장, 열람실 또는 판화실 등이 그것이다. 뮌의 기억 극장의 원형이 된 곳도 바로 이러한 장소이다. 이 어두운 방에서 빛은 단지 구멍에 의해서만 스며 나오고 이 구멍은 아주 굽어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순수내부의 장식물들을 밝게 비추고 색칠한다. 모나드는 원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방이다. 입구나 창이 없는 방, 여기에서 모든 작용은 내적이다. 바로크 시대의 모나드적 사유가 현대미술과 연결되는 지점은 연극성(theatricality)에 있다. 현대미술에서의 연극성은 미니멀리즘과 관련된다. 들뢰즈는 미니멀 아트에서 형상은 부피를 더 이상 제한하지 않으며 모든 방향으로 무제한적인 공간을 껴안는다고 본다.

 그는 지각 불가능한 열린 틈들이 있는 닫힌 교회의 제실이라는 고대의 모델과, 어두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밀폐된 자동차라는 토니 스미스가 내세운 새로운 모델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이 둘은 변동과 경로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처럼 일련의 단위 구조로 이어진 버티컬은 그 자체가 무대 막이자 무대가 된다. 이 무대에서 기억은 단지 역사적 사료가 아니라 몸의 지각과 연관되며, 공간에 붙박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 추이에 따른다. 이 무대는 들뢰즈가 말한 모나드처럼, 우주 안의 많은 길들을 실험하고 또한 각 길에 연관된 종합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을 긍정한다. 세계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면서 독특 점들 주위에서 수렴하는 무한히 많은 계열이다. 세계는 독특 점들의 순수한 방출이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조화롭다. 모나드라는 거울로 뮌의 작품을 비추어 볼 때 노동자나 서태지 같은 상징은 멜랑콜리를 자아내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형식은 낙관적으로 보인다.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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